W Interview

프로페셔널의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

도시건축가 김진애 ⑤

대부분 20~30대 때 많은 에너지를 소진하기 때문에 40~50대에 어떻게 일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요.

에너지는 또 나와요. 체력이 있어야 일할 수 있는 건 확실해요. 어느 정도 타고 나는 게 있지만, 꾸준히 노력하기도 해야 해요. 제가 지금껏 끊임없이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체력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에요. 아무래도 젊었을 때보다는 체력이 떨어지니까 신경을 쓰긴 하죠. 그렇다고 특별히 체력 관리를 하지는 않아요.

저는 강아지들과 산책하는 것이 유일한 운동인 셈이에요. 낮에 가능한 한 많이 걷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려고 최대한 노력해요. 그 정도면 충분해요. 기본적으로 튼튼한 편이고 크게 아팠던 적도 없어요. 항상 농담으로 “울 엄마는 열을 낳았다. 나는 둘밖에 안 낳았다. 아이 열 키우는 에너지와 비교가 안 되니 얼마든지 더 일할 수 있다”라고 말해요. 저는 지금도 배가 고파요. 앞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 엄청나게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자기 체력이 조금 부족한 사람들도 있어요. 제 경우 열정적으로 장시간 일해도 괜찮은 편에 속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패턴을 파악하고 체력을 어떻게 안배해야 좋을지 계획해야 해요. 저도 나름의 작전이 있어요. 요즘 [KBS 열린토론] 프로그램을 매일 저녁 진행하는데, 워낙은 아침 시사 프로그램 제안이 들어왔어요. 한 마디로 얘기했지요. “아침 시간은 나를 위해서만 쓰는 시간이다. 아침 시간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은 김어준 공장장뿐이다.” (웃음)

저에겐 새벽 시간이 정말 중요해요. 새벽 네다섯 시에 일어나서 열 시까지 약 너덧 시간 동안은 꼭 내 일을 해요. 하루에 다섯 시간을 집중해서 자신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힘이 돼고 하루가 여유로워요. 그 이후 낮에 하는 일들, 예를 들어 사람 만나는 일 등은 물론 일이긴 하지만 노는 것과 비슷하죠. 그 때문에 기력이 소진되지는 않아요. 이제껏 유일하게 소진됐던 시간은 국회의원 시절 4대강 사업을 다룰 때였어요. 정말 쓸데없이 벌인 일에 제 체력을 소모한 거죠.

@김진애 제공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건 유학 때부터 생긴 습관인가요?

30대 중반부터예요. 둘째 아이 낳고 난 이후인데, 첫째 때와는 달리 둘째를 낳고 나니까 내 시간 갖기가 그리 힘들더라고요. 그때 애하고 같은 시간에 자고, 같은 시간에 일어나면 딱 좋다는 걸 알았어요. 애가 아침에는 별로 보채지 않고 먹고 나면 2~3시간 혼자서도 잘 지내니까 저는 옆에서 일하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유지하고 있어요. 인생에서 좋은 습관 중 하나같아요.

 

저자로 쓴 책이 30권이 훨씬 넘더라고요. 엄청난 작업량이에요. 인터뷰 전 <인간의 조건>, <도시 읽는 CEO>, <인생을 바꾸는 건축 수업>, <왜 공부하는가>, <여자의 독서>를 꼭 읽었으면 한다고 추천해주셨는데요. 이 책들을 추천하신 이유가 있나요? 책이란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게 넘쳐나서 쓰는 것일 텐데,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궁금해요.

그 다섯 권은 제가 원해서 쓴 책은 아니에요. (웃음) <인간의 조건>만 제외하고는 다 제안이 들어와서 쓴 거예요. <인간의 조건>은 비례 대표할 때 지역구 출마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썼던 책이고요. 다른 정치인들처럼 쓰는 건 못 하겠고, 갑자기 한나 아렌트가 생각이 나더라고요. ‘한나 아렌트에 대한 내 존경심을 표현해야겠다.’ 해서 일종의 오마주처럼 쓰게 된 거예요. 만약 국회의원으로 계속 있었다면 좀 더 알려졌겠죠.

다른 네 권은 요청이 들어와서 낸 거예요. <도시 읽는 CEO>는 CEO 시리즈 중 하나였는데, 상당히 평이 좋아서 상도 받고 그랬어요. 사람들이 굉장히 신선해 했어요. <인생을 바꾸는 건축 수업>은 <매일매일 자라기>를 바꿔서 낸 거고요. <매일매일 자라기>를 썼을 때는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서 썼을 때예요. 그 시리즈 세 권을 쓴 건 이화여대 겸임교수를 할 때예요. 학생들이 모르는 게 너무 많더라고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책을 쓴 거예요. 꼭지 몇 개를 써서 학생들에게 주기도 했는데, 한 번 쓰기 시작하니까 정신없이 재밌게 썼어요. 그래서 차례로 <프로로 자라기>, <사람으로 자라기>를 썼어요. 쓰고 싶은 욕망이 엄청나게 높아져 있는 때였어요.

<왜 공부하는가>는 다산북스에서 공부에 관한 책을 써달라고 제안을 해서 썼어요. 처음에 ‘왜 건축을 공부하는가’를 제안하길래 그런 거 잘 못 쓴다고 했더니, 그럼 마음대로 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썼는데, 출판사에서 <왜 공부하는가>라고 제목을 붙였어요. 그런데 이 책은 처음에 톤 잡기가 힘들었어요. 왜냐하면, 저는 가르치거나 하는 책을 잘 못 써요. 유일하게 첫째, 둘째, 셋째 이런 식으로 쓴 게 ‘자라기’ 책이에요. 그러다 한번 톤을 정하니까 쭉 써지는데, 공부가 얼마나 내 인생을 끌어온 큰 힘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책을 많이 쓰니 사람들이 물어봐요. 어떻게 그렇게 많이 쓰냐고요. 별로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침마다 작업하는 게 대개 글 쓰는 거예요. 글 쓰고, 인터넷 검색하면서 놀고 그러는 거예요. 어쨌든 그냥 끄적이는 것까지 포함해서 하루에 평균 10매는 써요. 1년이면 3,600매잖아요? 그중에서 1/3만 간추리면 책이 되는 거지요.

책을 어느 정도 쓰면 에너지가 소진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별로 그렇지 않더라고요. 확실히 저는 주제가 많은 사람이에요. 최근에 낸 <집 놀이> 책은 원래 공간 프로젝트로 3개 주제를 구상하고 지난 5년 동안 준비해 온 거예요. 집, 도시, 일상공간 이렇게 세 가지 주제지요. 집 주제에도 한 권만으론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세 권으로 쓰려고 계획했고 첫 번째 책이 나왔는데, 시간을 두고 다른 두 권을 더 낼 거예요. <김진애의 도시 이야기>를 [뉴스공장] 방송에서 3년째 하고 있는데, 책 써달라는 요청을 무척 많이 받았지요. 지금 열심히 쓰고 있어요. 올해 나올 거예요.

책 쓰는 게 처음에는 어려워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니까 그리 어려운 건 아니라는 생각도 들지만, 여전히 글쓰기란 무척 어려워요. 제 책을 읽는 사람들은 오디오가 지원된다고, 내가 옆에서 말하는 것 같다는 평을 많이 해요. 말하는 방식의 글쓰기를 잘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아마 책 쓰기가 덜 힘든 것 같아요. 아마 죽을 때까지 계속 쓰지 않을까 싶어요.

 

말과 글이 일치되기 쉽지 않은데, 박사님의 경우 독서로 축적된 통찰과 사고가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어요.

영향을 줬을 거예요. 말하는 것처럼 쓸 수 있는지 없는지란 확실히 달라요. 유시민 작가의 책이 많이 팔리는 이유는 시대성을 반영하기 때문도 있지만, 그의 글을 읽으면 마치 내가 하는 이야기 같아 흡인력이 커지기 때문일 거예요. 글 안에서 내가 보이면, 사람들이 공감하게 되는 거예요.

사람마다 다른 글쓰기 방식이 있어요. 제 경우에 책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구조적이라는 평과 함께 말하듯이 쓴다는 평은 많이 들어요. 글을 쉽게 쓴다고 하는데, 그렇게 하려고 저는 얼마나 힘들겠어요? 좀 알아주세요. (웃음) 전문적인 글은 자료를 가지고 쓰니 오히려 별로 어렵지 않아요. 제 일생 해 온 훈련이 상대편을 설득하려면 어떤 레토릭을 쓸 것인가, 어떻게 해야 상대편의 마음을 파고들 것인가에 대한 것이지요. 훈련하면 분명히 늘어요. 아직도 제 책을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좋아요.

 

<매일매일 자라기>도 그렇고 일했던 경험을 통해서 노하우를 알려주는 책을 많이 쓰셨어요. 필드에서 전혀 알려주지 않는 정보이기도 했고, 어쩌면 스스로 그 시기에 알고 싶은 것들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 시절에 누가 나한테 그런 책을 줬더라면, 아마 저는 건축과를 선택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알고도 선택했을지도 모르지만요. 그런데 그게 너무 이상했어요. ‘왜 안 알려주지? 왜 구체적으로 얘기 안 하지? 얘기하면 훨씬 더 쉬워지고 훨씬 더 재밌어지는데’ 싶었죠. 베이스라인을 공유해야 그 위로 뭔가 더 근사하게 만들 수 있는 거 아닐까요? 베이스라인 수준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더 근사한 게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화여대 강의가 계기가 되셨다고 하셨는데, 그 책을 통해서 후배 세대들한테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딱 두 번 강단에 섰는데, 이화여대와 카이스트였어요. 이화여대 건축과 설계 스튜디오 강의를 2년 했는데, 솔직히 그런 전통적인 수업 자체를 즐기는 편은 아니에요. 그래도 <매일매일 자라기>를 쓸 자극을 받았으니까 보람은 있었죠. 정말 재밌었던 수업은 카이스트에서였어요. 미래도시연구소 겸임교수였는데, 딱 두 학기 ‘도시 상상’이라는 강의를 했어요. 그때 수강생이 50여 명 정도 꽤 많았는데 여러 학과 학생들이 수업에 들어왔어요. 카이스트에 건축과는 없지만, 전자, 컴퓨터, 생명, 기계, 토목, 디자인 등등 각종 학과에서요. 16주 수업이었는데, 그 짧은 시간에 제가 학생들을 좀 흔들어 놨어요.

도시라는 주제가 참 좋은 이유가 있어요. 도시는 자신의 전공 분야가 무엇이든 다 그 안에 투영 가능해요. 도시를 만들 때 무엇을 생각할 수 있나, 뭘 상상할 수 있나 질문을 던지고, 뭔가 만들어 보라고 하니 얼마나 신났겠어요? 첫 과제는 SF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리포트 쓰게 하고, 둘째 과제는 팀을 짠 후 각 팀에 미래도시 상상 제안을 하는 구성이었어요. 몇 개 시나리오를 주고 각 시나리오에 대한 도시를 구상해서 내놓는 거죠.

예를 들면, 재앙 시나리오. 재앙도 환경 재앙이냐 불 재앙이냐 물 재앙이나 여러 종류가 있잖아요? 카이스트 학생들이 뛰어난 것도 있겠지만 팀워크를 통해 나오는 이야기들이 아주 흥미롭더라고요. 학생들도 흥겨워했고 저도 너무 재밌더라고요. 가장 좋은 것은 수업 이후에 학생들이 가지게 된 자신감이에요. 어떤 학생은 “자기가 4년이 되도록 왜 카이스트를 다니는지 몰랐는데, 마지막 학기에 우연히 이 수업을 듣고 이제 그 의미를 찾았다”라며 후기를 써주더라고요. 후에 너무 근사하게 자라서 찾아왔어요. 그렇게 자라는 모습을 볼 때가 참 좋아요.

도시가 흥미로운 이유는, 도시가 ‘잡학’이기 때문이에요. 그 안에 정치 경제, 행정, 혁신, 복지, 교통, 기술, 예술, 건축까지 다 들어있어요. 그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게 도시예요. 역동적이죠. 그래서 굉장히 즐거워요. 인간에 대해서 생각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인간이 모여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항상 얘기하지만, 인간이 모여 살면 하여튼 문제가 생겨요. 인간 하나하나는 선하지만 둘만 모여도 갈등이 생기는 거죠. 인간 개인으로는 성선설, 인간사회로서는. 성악설이 맞는 것 아닐까요? 거기서 어떤 질서를 만들어 내느냐. 어떻게 해야 우리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느냐에 대한 고민을 해야 돼요. 그게 도시예요. 그래서 도시로 들어오면 사람들은 자기 분야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느냐에 대해 생각하게 돼요. 이런 스타일의 수업은 계속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학과 가리지 않는 교양 과목으로 공간에 대해 강의를 하고 싶었어요. 몇 학교에 문의도 했었어요. 이러이러한 수업을 하고 싶은데, 학교에 개설해 줄 수 없겠느냐고요. 다들 건축과든 도시과든 학과에 소속되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건 하고 싶지 않은데 말이죠. 특정 학과에 소속되는 건 별로예요. 그렇게 되면 민원에 시달리게 돼요. 그리고 여러 작업 요청에 계속 시달리는 게 힘들어요. 그러다 보면 자문을 안 해줄래야 안 해줄 수가 없게 되고요. 그런 처지가 되기 싫어요. 그래서 어디 소속되는 것을 원치 않는 거예요. 소속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렇게 살고 있어요.

 

실무 작업을 멈추게 된 계기가 있나요?

현실 정치를 하면서 그만둔 거죠. 우리 분야에서 싫은 것 중 하나가 ‘ㅂ자 돌림병’이에요. 우리 사회의 ㅂ자 돌림병을 상대로 평생을 싸워 왔는데, 그게 부정, 부패, 비리, 부실 같은 거예요. 그런데 부동산도 ㅂ자 더라고요. 우리 분야가 피곤한 이유는 항상 민원과 이익과 연결돼 있다는 거예요. 전문가로 활동할 때도 아무래도 제 영향력이나 사람들과의 관계를 기대하면서 민원이 끊임없이 들어와요. 예를 들면 어느 지역의 그린벨트를 풀어달라고 하기도 하고요. 그런 부분 때문에 엄청나게 오해를 받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딱 끊은 거예요. 출판이나 강연 등은 할 수 있는 거니까. 그래서 마음이 훨씬 편해졌어요.

특히 국회의원 그만두고 난 후에 명확하게 이야기했어요.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요. 누군가에게 자문해주는 것도요. 국회의원 한 번 하고 나면, 관두더라도 여전히 제 영향력이 있다고 여기거든요. 제 발언을 이용하기도 하니까 아예 자문도 안 해줘요. 결국 ‘자문비도 못 받고, 고문비도 못 받고 이제 뭐 먹고 살지?’ 생각하다가, “저는 책 쓰니까요. 제 책이 꽤 잘 팔려요”라고 해요. 사람들은 나보고 뭐 먹고 사냐고 묻지만, 책 쓰고 강연하는 것만도 국회의원 하는 것보다 나아요. 그래서 글을 많이 쓰는 거예요.

건축가, 도시계획가, 작가, 국회의원 등등 특정 직업을 호칭하는 것이 의미 없을 만큼 여러 방면에서 활동해오고 계십니다. 자신을 설명하는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요새 [열린토론] 진행하면서 저 자신을 “시민, 김진애입니다”라고 소개해요. 이것저것 다 찍고 이제 시민으로 돌아왔다고 말해요. 저를 교수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많은데, “저 교수 아닙니다”라고 해요. 박사라 부르는 건 박사학위가 있으니 오케이죠. 그런데 전 국회의원, 전 00위원장 이렇게 불리는 것도 마땅찮고요. 도시 전문가라는 사람이 [열린토론] 진행까지 하느냐 물으면, “도시가 원래 잡학이고, 저는 잡학박삽니다. 이 모든 걸 돌아서 드디어 시민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모든 시민은 열린토론을 진행할 자격이 있습니다”라고 하지요.

 

라디오 활동이 맞으시나요?

TV는 싫어요. TV는 생방송이 아니니까 여러 방식으로 기획을 하고, 또 자기들 입맛에 맞게 편집을 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나가지 않으려 하죠. 물론 맘에 드는 프로그램이 있으면 나가죠. 라디오처럼 자신의 목소리로 콘텐츠와 아우라를 전달하는 게 진짜라고 생각해요. 어릴 때부터 라디오 진행은 언젠가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기회가 올지는 몰랐죠.

[열린토론] 진행을 수락한 이유는 그런 제안을 제 연배의 여성에게 했다는 점 때문이에요. 솔직히 KBS를 다시 봤어요. 처음엔 사양하는 입장에서 “글쎄요. 저는 [열린토론] 외에는 관심이 없는데요”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랬더니 그 프로를 다시 살려 오더라고요. 앞서 롤 모델을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제 연배에서 새로운 일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바람도 있었어요. 제가 자랄 때 ‘여자가 이렇게 할 수 있다’라는 롤 모델을 찾을 수 없어서 힘들었기 때문에 더 그런 생각을 하지요.

라디오 [뉴스공장]에서 ‘도시 이야기’ 코너를 시작할 때도 ‘세속적인 허영심을 만족시키려는 내용은 안 하겠다’고 제작진들에게 이야기했어요. 건축에는 멋과 허영심이 작용해요. 그게 없으면 또 지탱되지 않는 분야가 건축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방송에서 멋진 공간, 근사한 건축을 알려달라는 압력이 꽤 있는 거고요. 저는 그런 요구에 거부감이 있는 편이고요. 적절하게 균형을 잡으려 노력을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죠.

꼭 도전해보고 싶은 분야, 일이 있나요?

‘7585 프로젝트’도 저에겐 있어요. 일흔다섯부터 여든다섯까지 할 프로젝트도 있을 정도로 하고 싶은 게 쌓여있어요. 사실 제가 하고 싶어 했던 것 중 하나가 포장마차예요. 어른을 위한 장난감을 만들어 팔고도 싶었고요. 정치하느라 못했어요. 한 십 년, 이십 년만 늦게 태어났어도 영화감독을 하고 싶다고 했을 것 같아요. 영화감독은 못 해도 영화 시나리오는 쓰고 싶다고 끊임없이 최면을 걸어요. 죽기 전에 추리소설은 꼭 써야 해요. 플롯도 써놨어요. 그 외 무슨 일을 실제로 할지는 저도 몰라요. ‘제가 무슨 짓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재미나게는 해드리겠다’라고 늘 말하죠.

[열린토론] 진행하는 것도, [도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예상치 못한 제안이었어요. [뉴스공장 도시이야기] 덕분에 도시건축에 대해서 알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인기도 끌고 제 이미지가 좀 더 친근해졌는데, 그게 좋아요. 예전에 정기용 선생을 주제로 한 다큐영화 제목이 <말하는 건축가>였잖아요. 요즘 제가 정확히 그 ‘말하는 건축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괜찮은 역할 중 하나라 보지요.

젊은 건축학도들에게 많이 이야기하는데 건축을 전공했다고 해서 꼭 건축가가 될 필요는 없어요. 건축과 출신 중에도 건축가가 되는 경우가 얼마 안 되고, 거기서도 자기 이름을 건 프로젝트를 하는 건축가도 몇 % 안 돼요. 역사에 남는 건 더더욱 적고요. 일자리도 일감도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그러니까 설계만 해서는 먹고 살 수 없다고 늘 이야기해왔어요. 제가 공공건축가를 많이 이야기했던 것도 다른 일감들을 찾아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전문성으로 공공 봉사하는 방식이죠. 그 외에도 문화 관련이나 방송 쪽에도 건축 분야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아요? 그런 영역을 계속 넓히는 게 필요합니다. 제가 그런 역할을 어느 만큼 보여줬다면 그걸로 오케이죠.

 

박사님도 여성으로 싸워서 이룬 성취가 있으실 텐데요. 지금 2~30대 여성들도 현재와 싸우고 있어요. 지금 여성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일단 미투 운동 이후의 여성에 관해 이야기해보죠. 이전에도 페미니즘 열풍이 있었지만 대중적 이슈가 되지는 못한 한계가 있었는데, 지금을 보면 예민함의 강도가 훨씬 강해졌다고 봐요. 여성, 남성에게 다 영향을 미칠 거고, 간단치 않을 거로 생각해요. 어떤 사람들은 펜스 룰이라든가, 여자들이 더 위축될 거라든가, 남자들은 여자들을 일에서 더 멀리하고, 여자 대 여자의 싸움이 될 거라는 등 미투 운동의 부작용을 걱정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한 마디로 이야기하고 싶어요. 여자들의 사회 진출은 많아질 수밖에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늘어날 거고, 만약 그렇게 여자를 멀리하는 조직이나 사람은 결국 도태될 거라고요. 저는 무척 긍정적으로 보죠. 어떤 과정이 있든 간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건 맞아요. 다만 그 과정에서 엄청 골치 아픈 일들을 많이 겪을 거고요.

요즘은 남자들과 이야기할 때 다른 분위기를 느껴요. 남자들도 꽤 신경 쓰면서 말해요. 제 경우 어렸을 때 여성스럽지 않다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여성인가, 여성으로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 답을 찾은 게, 이른바 양성성에 대한 거예요. ‘남성안의 여성성, 여성 안에 남성성’이죠. 모든 인간에게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있다는 생각을 20대에 다 정리했어요. 저는 남성성이 꽤 강한 사람이에요. 사람들은 제가 별로 여자답지 않다고 말하지만 제 안에 여성성도 무척 강해요. 밖으로 잘 안 보여줄 뿐이죠. 저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귀찮아서인 것도 있고요. 제가 남성성이 강하다면, 그것도 많이 훈련했기 때문이에요.

남성성은 의지, 결단, 추진력, 네트워크 능력 같은 건데, 훈련으로 길러져요. 그런데 여성성이라는 정교함, 치밀함, 관계성, 엮어냄 이런 건 훈련으로 되긴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감성적으로 훨씬 더 자연스럽게 몸에 익어야 해요. 우리 사회가 정말 발전하려면 남성 안의 여성성을 끌어내야 한다고 늘 주장하죠. 여자 안에 숨어 있는 남성성을 감추려고 하지 말고 떳떳하게 드러내야 한다고요. 우리 안의 여성성과 남성성을 마음대로 오가면서 적절한 상황에 끌어내서 살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해요.

저는 그렇게 노력했어요. 사실 남들이 저보고 남자 같은 여자라고 한다면, 그건 인정해요. 저는 파워 의지도 강렬하고 영화 <아라비아 로렌스>를 좋아한 것처럼 결단과 의지를 키우려고 노력했어요. 한동안 제 여성성에 대해 의심하기도 했고, 죽이려고 한 적도 있어요. 관계라든가 배려라든가 섬세함 같은 걸 많이 감추려 했던 적도 있어요. 그런데 그런 노력이 쓸데없다는 걸 알았어요. 모든 인간이 자기 안에 숨어있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끊임없이 오가며 살라고 말하고 싶어요.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는 못 나갈 분야가 없고, 못 넘을 벽이 없고, 한계라는 건 거의 없어요. 요즘 4차 산업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다른 게 아니에요. 기술적인 적인 건 다 일어나는 거고, 여러 분야의 감수성을 높여야 발전 가능한 게 4차 산업이거든요. 그게 바로 남성성과 여성성을 잘 조화시키는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가 그걸 극복하지 못하면 질적 발전을 이루기가 어려워요. 산업화나 정보화만 하더라도 훈련된 남성성만으로 넘어올 수 있었어요. 좀 더 크리에이티브 해지려면 남성성과 여성성을 오가야 합니다. 남자, 여자가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좀더 창의적이기 위해서는 남성성, 여성성에 대해 거침없이 드러내고 반가워 해주어야 해요.

미투 운동이 이뤄지고 나서 굉장히 반가우면서도, 서로 눈치 보여서 불편해지기도 하지요? 여성들끼리도 눈치 보는 거 아시죠? 요즘 딸 눈치도 봐요. (웃음) 우리 딸이 30대 초반이에요. 상당히 리버럴한 분위기라 요즘 사건에 대해 많이 대화하게 되는데,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딸이 저를 비판하고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제가 딸을 비판하곤 하지요. 여자들끼리 또 세대를 넘어서 이런 대화 또는 토론을 하는 것도 굉장히 좋은 거라고 봐요.

제 개인적인 모토가 ‘자라자, 배우자, 평생토록!’이잖아요. 저의 인생관은 인간성으로 가질 수 있는 모든 잠재력을 다 발휘해보자는 거예요. 가능하면 더 느끼고, 더 많이 만들어내고, 조금이라도 변화를 만들어내는데 기여하면 좋죠. 가능한 한 많은 걸 느끼고 알고 또 하고, 떠나고 싶어요.

 

정치는 현실 참여인데, 그래도 기회가 있다면 정치를 하실 의사가 있으신가요? 선거는 안 나갈 거예요. 정치에서 하고 싶은 역할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서울시장. 그런데 그건 지나갔죠. 글쎄, 다음번에 나가볼까요? 그런데 플랜을 짜기가 싫어요. (웃음) 50대만 해도 뜻을 세우면 플랜을 짰는데, 이젠 하기가 싫어요. 그냥 기회가 오면 잘하면 돼요. 이런 게 나이 든 거겠지요.

<알쓸신잡 3> 피렌체, 두오모 오르는 길에 유희열, 유시민과 함께 @김진애 제공
<알쓸신잡 3> 프로그램 중 부산 달동네에서 @김진애 제공

<알쓸신잡>은 대중과 더 폭넓게 만난 경험이셨을 텐데요. 도시와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에서 어떤 점이 가장 즐거우셨나요? 방송의 환경이나 프로그램 성격도 이전과 다를 텐데, 자신이 그대로 관찰당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시즌 3이 되어서야 첫 여성 출연자가 나왔다고 꽤 화제가 되었지요? 시즌 1, 아주 괜찮은 프로가 나와서 좋았는데, 여성이 없었죠. 설마 시즌 2에는 여성 패널이 있을 거라 여겼는데 또 아재들뿐이라서 저도 꽤 세게 비판을 했었어요. 그 비판이 통했던지, 출연 요청이 오대요. (웃음) 시즌 4를 한다면 여성 둘이 있으면 좋겠어요. 지식 교양 예능 프로일수록 양성이 섞이는 게 좋고요, 비율도 맞으면 그에 따른 역동적인 케미가 생길 테니까요.

여성 출연자를 구하기 어렵다고 제작진들이 고충을 토로하던데, 글쎄 잘 믿어지진 않습니다마는, 여성 전문가들이 훨씬 더 준비성을 따지고 대중적인 자리에 나가는 걸 주저하는 현상은 있는 거 같아요. 대중매체에 나가면 주목받아 좋은 점도 있지만, 대중의 시선에 노출되면 비판도 받고 욕도 먹고 이른바 ‘입방아질’에 오르지요. 요샌 SNS가 활발하니 더욱더 그렇고, 여성은 집중 표적이 되기도 하고요. 여성 전문가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권하고 싶어요. 그 고개를 넘어서야 또 다른 게 보인다고, 또 다른 걸 이룰 수 있다고요.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재밌었어요. 대화의 역학도 흥미로웠고요. 생각 많고, 느낌 많고, 아는 것 많고, 말 많이 하고 싶어하는 잡학박사들이 모인지라 녹화 시간이 넘 길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랄까요. 하루 열여섯 시간 말하고 다니는데, 노동 강도가 높아요. <알쓸신잡>도 완벽할 수야 없지만, 그 도시의 면면을 깊이 들여다본다는 것, 공간에서부터 촉발되는 지식과 인간 이야기를 자유자재로 얘기한다는 것, 아주 신선하죠. 서로서로 자극하고요. 대화하다 보면 도대체 어디로 튈지 몰라요. 예측 불가, 그게 큰 재미죠.

제가 TV 싫어한다고 했지만, 한번 출연을 결정하면 완전히 맡겨요. <알쓸신잡> 제작진에 대한 신뢰가 있었고요. 편집을 어떻게 하든 어떤 효과를 넣든 그들의 재량이죠. TV의 경우에는 물론 출연자들도 중요하지만, 제작진의 역량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해요. ‘김진애는 카메라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라는 평을 꽤 들었는데, 제가 그런 스타일이에요. 맡기고 나서, 그냥 평소 하던 대로 하는 거죠. 그래도 옷도 신경 쓰고 메이크업도 하고 말도 줄이려 노력했는데요? (웃음)

이번 시즌 3은 절반은 해외도시라서 어떤 반응이 올까 궁금했는데, 흥미로운 건, 해외 도시 에피소드보다 국내 도시 에피소드가 훨씬 더 호응도가 높더라고요. 반가운 현상이에요. 그만큼 공감도가 높고 시청자들이 가보신 데도 많고 가보고 싶어 하는 데도 많다는 증거 아니겠어요? 우리 역사, 인물, 자연, 문화, 도시에 관한 관심이 크다는 게 좋고요. 실제로 출연자들도 국내 도시들 다닐 때 훨씬 더 재미있었고, 영혼적으로도 여유로웠어요. ‘우리 이야기’를 한다는 건 그리 좋아요. OHS

 

진행 임진영

사진 정멜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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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P 5주년 기념 SPECIAL TOUR DDP의 백도어를 열다, 삼우설계 + DDP 팀 5월 24일 5:00PM
DDP 5주년 기념 SPECIAL TOUR 새로운 질서의 패러다임, 자하 하디드, 건축가 이정훈(조호건축) 5월 24일 2:00PM
Special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미래주의적인 공간, DDP, 하지훈 가구디자이너 서울에 불시착한 우주선 같은 DDP, 전문가 인터뷰를 통해 5년이라는 시간 동안 DDP가 시민들에게 어떤 장소가 되었는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마지막 인터뷰에서는 하지훈 가구디자이너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DDP와의 첫 만남을 혹시 기억하시는지요?  DDP가 개관 당시 가구 컬렉션을 했는데, 제 의자도 컬렉션에 포함되어서 그때 처음 인연을 맺었어요. 이후 DDP에서 열린 <백두대간 와유(臥遊)> 전시에도 참여했어요. 제가 디자이너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연이 닿게 되었어요.   DDP에 자주 가시나요? 자주 가죠. 전시 보러 가는 경우가 가장 많아요. DDP가 생기면서 가장 좋은 것은 서울에 디자인 전시를 비롯해 수준 높은 전시를 유치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사실이에요. 그게 가장 반가운 부분이에요. DDP에서 교수님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어디인가요? 둘레길.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전시공간이 없어요. 전시공간으로서  안 좋을 수도 있죠. 그렇지만 어떻게 보면 그런 식의 공간이 어디에도 없으니까 독특한 전시를 할 수도 있어요. 건물 안에 길이 있다는 건데, 그것이 자하 하디드의 건축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보통 화이트 큐브 전시에서는 공간 전체가 한눈에 다 보이고, 전시품들이 공간 안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둘레길은 시선 안에 공간이 한꺼번에 다 드러나지도 않고, 마치 내가 산책하듯이 걸으면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잖아요. DDP만이 가진 굉장히 유니크한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자하 하디드의 비정형 공간이 갖는 가치, 혹은 건축적 의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실 우리나라는 관념적인 것에 너무 갇혀 있는 것 같아요. 저도 매번 일하면서 느끼지만, 심지어 제가 하는 일도 항상 관념과 싸움이라고 볼 정도예요. 사람들이 가구를 판단할 때, 이 의자가 편한가를 보고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의자에 사람이 앉아 있는 시간은 얼마 안 된단 말이에요. 그런 면에서 의자 디자인에서 과연 사람이 중심이냐, 아니면 조형적인 것이 우선이냐 했을 때, 조형성이 우선시 될 수도 있다는 거죠. 모든 것을 하나의 가치로 판단할 수는 없어요. 예술과 디자인은 어떻게 보면 명확한 답이 없는 분야라는 거죠. 그래서 자하 하디드의 건축물에 대해 구불거리는 벽 때문에 기능적으로 공간 효율이 떨어진다고 불평한다면 그건 잘못됐다는 거죠. 어떻게 보면 DDP 같은 건축물은 도시 안의 아주 거대한 조각 작품으로서 더 많은 가치를 갖는 것 같고, 하나쯤은 그런 게 있어야 한다고 봐요. 모든 걸 다 공간 효율성으로만 따지다 보면 이 세상이 얼마나 건조하겠어요. 이렇게 크레이지한 공간도 있어야, 사람들이 DDP를 보면서 어떤 예술적인 감동을 얻는 거죠. 이것도 기능보다는 조형성이 갖는 사회적인 기능이자 의미라고 봐요. 저는 그런 게 굉장히 필요하다고 봐요. 물론 다른 개념의 건축물들도 있어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같은 것이 그래요. 저도 굉장히 좋아하는 공간이지만 자하 하디드의 건축물과는 완전히 양쪽 끝단에 있는 거예요. 터에 대한 것, 그리고 기무사 건물을 유지한다거나 아니면 거기에 원래 있었던 역사성을 부드럽게 이어서 만들어나가는 건축이 있는 거죠. 반면에, 모든 것을 제쳐두고 정체성과 개성, '– 주의적'인 것이 강한 건축물도 있어야 한다고 봐요. 그래야 그 도시가 풍성해 지는 거죠. 그래서 DDP가 굉장히 중요하고 의미 있는 거예요. 서울에 그런  공간이 없거든요. 물론 처음에는 말이 많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모든 관광객이 둘러보는 공간이 됐단 말이에요. 그게 중요해요. 저는 덴마크에서 공부했는데, 덴마크에서는 그런 의미에서 건축에 투자를 많이 하고, 특히 주로 공공건물에서 상징성을 풀어내요. 도서관 같은 거요. 저는 그렇게 풀어나가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공공건물은 왜 맨날 재미없고, 저예산으로 만들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시간이 가면 갈수록 가치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것을 만드는 게 오히려 더 친환경적이고, 돈을 남기는 거라고 생각해요. 투자를 할 수 있는 곳은 투자를 많이 해서 오랫동안 사회 환원할 수 있는 시스템이 더 중요하다고 봐요. 공공건물은 여러 사람한테 의미를 전달해 주는 거잖아요. 사람들에게 ‘저런 건물이 들어서니까 주변 공간이 어떻게 바뀌고, 사람들이 어떻게 모이고’하는 것들을 인식시키는 것으로 공공건물이 가장 효과적인 거죠.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관념적으로 공공건물에는 돈을 많이 쓰면 안 된다는 둥 여러 가지 저해 요소가 있어요. 관념과 싸움에서 그걸 어떻게 관철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한 거죠. 그게 예술이고요. 싸워나가는 거죠. 다른 생각을 갖고 간다는 것이 필요해요. 그래서 DDP가 중요한 겁니다. DDP는 우리나라의 건축에 대한 관념을 깨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당신들이 생각하는 게 틀릴 수도 있다는 것들을 보여주는 거잖아요. 건축만큼 많은 향을 줄 수 있는 게 어디 있어요. 도시와 건축의 관계에서 또 도시의 풍경 측면에서, 서울 안에서 DDP의 의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아까도 얘기했듯이 정답은 없어요. 어느 공간에 외계 우주선이 추락한 듯한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도 공간을 구성하는 데 필요하다는 거죠. 그러니까 DDP는 그 공간에 대한 주변 것들을 고려해서 만들어진 공간은 아니에요. 충격적인 공간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고, 사실은 그런 공간들이 우리나라에는, 서울에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너무 다 똑같이 생긴 아파트와 건물들이어서 공간이, 도시가 재미없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잖아요. 그런 공간에서 이렇게 충격을 줄 수 있고, 조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들이 필요해요.     DDP는 하나로 단정 지을 수 없는 복합문화공간의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모두 DDP와 나름의 접합점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혹시 디자인계 내에서 DDP의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제 경우는 DDP가 있어서 안심하게 돼요. 내가 지금 DDP와 뭔가 하지 않더라도 ‘DDP가 있으니 언제든 거기서 무언가를 하면 돼’ 라고나 할까요. 그런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 디자인 분야에서 뭔가 안심할 수 있는 든든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또 DDP에 관해 이야기할 때 패션이니 디자인이니 그런 것은 상관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의 안 좋은 부분 중 하나가 자꾸 공예, 디자인, 예술, 패션, 건축 등 분야를 나눈다는 거예요. 그걸 왜 나누나요. 장르가 무너진 지가 언젠데요. 오히려 이제는 장르 구분하지 않고, 확실하게 DDP라는 공간의 퀄리티에 맞는 전시 기획을 하면 좋겠어요. 퀄리티 있는 전시들이 잘 필터링 되어서 DDP에서 계속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다른 기획을 하는 것보다 좋은 전시만 계속 보여줘도 DDP의 역할은 다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요새 가장 자주 회자되는 화두가 플랫폼이라는 단어입니다. 앞으로 DDP는 그 자체로서 어떤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디자인 산업과 연계해서 기대하시는 바가 있으시다면? DDP에 가면 전시뿐만 아니라 콘텐츠가 많아야 해요. ‘주말에 우리 어디 갈까?’ 했을 때 DDP에 가면 하루를 온전히 그곳에서 보낼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는 거죠. 어렵죠. 수익에 대한 부분도 그렇고요. 그렇지만 사람들이 아무런 준비를 안 하고 가도 충분히 볼거리가 있어야 해요. 처음에는 건축물을 보러 갔다가도 두 번째부터는 이전과는 다른 즐길 거리, 즉 콘텐츠가 계속 있어야 하는 거죠. DDP의 가장 큰 숙제이기도 해요. 요즘은 백화점만 해도 푸드코트에 전국 맛집들을 불러 모으잖아요. 그러니까 DDP 안에서도 다른 공간에서 볼 수 없는 전시라든지 아니면 F&B 라든지 그런 것들에 대한 기획이 필요한 거죠. 어려운 문제예요. 사람도 필요하고요. 이런 걸 예술에서 많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현대미술관을 보면 큐레이터 제도가 있잖아요. 외부기획자도 있고요. 다시 말해 내부에서 모든 기획을 다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예산이 있으면 그 예산 안에서 좋은 기획을 풀어나가는 것이 필요할 거 같아요. 그럼 부담 없이 해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DDP가 비판 받는 이유는 그 좋은 공간을 가지고 왜 그렇게밖에 못하냐는 내용이 가장 많을 거예요. 저는 오히려 디자인이라는 굴레를 벗어났으면 좋겠어요. 조금 더 범위를 넓혀서 예술과 문화가 더 어우러지면서 장르에 좀 더 관대해졌으면 좋겠어요.    5주년을 맞은 DDP에 덧붙이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더 오래된 것 같은데 5주년밖에 안 됐네요. 저는 이 점이 매우 긍정적이라고 생각해요. 요새 DDP 주변에 여행용 가방 끌고 다니는 외국인들이 매우 많잖아요. 그런 것을 보면 저는 역시 DDP를 만든 게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앞을 내다보고 투자를 좀 더 했기 때문에, 관광객들이 여기서 머물 수 있고, 한국, 서울을 방문하게 되는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잖아요. 그런 역할을 해주는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죠. 물론 앞으로 풀어야 하는 숙제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결국 우리의 문제는 항상 너무 조급하게, 한 번에 다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니 그것만 조심하면 될 것 같아요. 어차피 DDP는 오랫동안 그 장소에 머물러 있을 테니 한 달, 일 년, 조금씩 더 앞으로 나아지면서 건축의 완성도에 걸맞게 콘텐츠의 완성도를 높여야 한다는 것이 앞으로 남은 과제이지 않을까요? 그런 것들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디자이너뿐만 아니고 모든 서울시민이 격려와 지원을 해줘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OHS 진행 최진이
DDP 5주년 기념 SPECIAL TOUR “곡면이 만들어내는 감동, 형태에 대한 집착”, 유현준 건축가 서울에 불시착한 우주선 같은 DDP, 전문가 인터뷰를 통해 5년이라는 시간 동안 DDP가 시민들에게 어떤 장소가 되었는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두 번째 인터뷰는 유현준 건축가입니다.   DDP에 자주 가시는 편인가요? 자주 가요. 1층 숍에서 가방이나 시계같은 물건도 많이 사요. (웃음) 제가 평양냉면을 좋아하는데, 장충동에서 평양냉면을 먹고 태극당에서 모나카 먹고 동대문 DDP 물건을 사는 게 즐겨가는 코스예요. 심지어 밤에 동대문 시장 구경도 가요. 주차가 편하고 편안하고 깨끗해서 좋아요.  DDP가 들어섰을 때 첫 인상이 어땠나요? 저는 자하 하디드를 싫어하거든요. (웃음) 싫어하는 건축가였는데 완성된 다음에 생각이 바뀌었어요. 삼성물산에서 건물을 완성도 높게 지었어요. 조감도의 그 곡면이 보기 싫게 나올 거라고, 흉물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제가 본 자하 하디드 건물 중 가장 완성도 있게 나온 것 같아요. 깜짝 놀랐어요. 조감도가 드러났을 때 많이 회자되었는데요. 초기 계획안에서 변경도 되었습니다. 완성된 것과 차이는 어떻게 보시나요? 조감도가 워낙 별로였어요. (웃음) 공모전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자하 하디드가 이런 퀄리티의 조감도를 내보내다니 싶었어요. 너무 신경을 안 쓴 것 같더라고요. 그런 안이 당선되어 걱정을 많이 했는데 역시 곡면이 주는 건축물의 감동이 있잖아요. 또 금속 패널로 만든 곡면인 데다가 엄청나게 큰 스케일의 건축물이 주는 강렬함이 있어서 나름대로 풍경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고 봐요. 주변 컨텍스트와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어수선한 주변에 맞추기는 어렵죠. 그런 면에서 다음 100년을 위해서는 괜찮은 건물인 것 같아요. 서울에서 웬만한 건물을 다 부수고 재개발해도 DDP는 절대 부수지 못할 거예요. 워낙 고가로 지었기 때문에요. 유럽에서 만들어진 좋은 건물들은 다 큰 예산을 들여서 못 부수는 거잖아요. 우리는 그 정도로 공사비가 높은 건물을 만든 적이 없기 때문에 그만큼 보존이 안 된거죠. DDP는 대한민국 역사상 단위면적당 공사비 금액이 가장 높은 건물이에요. 공을 들여서 만들었고 무엇보다 구조적으로 당대에 최첨단(cutting edge)의 컨디션을 보여준 것이기 때문에 남을 만한 건물이라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고 또 제가 할 수 있는 디자인은 아니지만, 괜찮은 건물이라고 생각해요.  DDP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어디인가요? 캔틸레버보가 크게 나와 있는 브릿지 밑 광장을 가장 좋아해요. 야외 공간인데, 비를 안 맞을 수 있는 지붕이 덮여있는 기분 좋은 공간이에요. 그 정도 스케일의 공간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잠수교밖에 없거든요. 어반 스케일의 처마가 있는 공간은 참 좋은 것 같아요. 서울시청 건물도 비슷한 콘셉트로 시작했으나 약하게 삐쭉 나와서 그 아래 공간을 느끼기가 힘들죠. DDP는 그 공간감이 굉장히 좋아요. 비정형 공간이 갖는 가치와 의미 혹은 건축적 의미와 함께 교수님이 생각하는 자하 하디드 건축의 한계에 관해 이야기 해주신다면? 우리나라의 경우 온돌 때문에 1층짜리 건물밖에 없었어요. 비 때문에 지붕이 경사가 져야 하고요. 1층짜리 건물에 지붕을 경사로 만드니까 건물 입면에 곡면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들어가게 돼요. 지붕이 입면의 절반을 차지하는 건물이죠.  그런 건물을 봐오다가 근대에 보일러가 들어오고 2층짜리 철근콘크리트 양옥을 짓고 고층화가 되면서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파사드(건물의 정면)’라는 것을 갖게 된 거죠. 벽으로 서 있는 건축을 2000년 동안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하다가, 1970년대 들어서서 처음으로 아파트에서 본 거예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파트에 대해 ‘성냥갑 같다’는 반감을 가지는 이유가, 우리 유전자에 없던 건물이기 때문이거든요. 그렇다고 우리가 ‘벽의 건축’ 디자인을 잘하지도 못해요. 파사드를 가지는 건물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입면 설계라는 것을 해본 적도 없어요. 그런 것들을 지금 배워가는 단계라고 봐요. 비정형 건물을 통해 우리가 많이 놓친 부분들, 우리가 못 찾아낸 건물들, 추억들을 찾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초가집 지붕의 곡선이라든지 기와 지붕의 곡선, 처마 공간 등이 우리가 느껴온 전통 건축인데, 비정형 건축을 볼 때 예전에 익히 봐오던 가치를 비슷하게 나마 느낄 수가 있어서 높은 점수를 주는 경향이 있을 것 같아요. 한계라고 한다면 자하 하디드는 디자인 프로세스 자체가 오브제를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에, 형태는 재미있게 나오는데 내부 공간은 상가 건물과 똑같아요. 밖에서 봤을 때의 감동이 내부에 가면 ‘내가 도대체 비정형 건물 안에 들어온 것인지, 금강쇼핑센터에 들어온 것인지’ 구별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 이유는 내부와 외부의 교류가 없어서인데, 형태를 위한 형틀을 다 벽으로 불투명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에요. 그래도 DDP의 경우, 창문을 만들고 타공 철판으로 바깥쪽을 감싼 부분이 아주 최소한으로 있죠. 타공 철판 앞쪽에 가면 바깥 경치가 보이겠지만 조금만 측면에서 보면 다 벽으로 보여요. 그래서 자하 하디드가 언덕을 만들고 추억을 가져왔다고 한 것에는 동의할 수가 없어요. 내부에서 언덕이 하나도 안 보이거든요. 그것이 형태에 집착하는 건축의 한계인 거죠. 공모전 때 당선작을 비판하는 부분이기도 했고요. (웃음) 동대문의 역사성이 없다고도 비판하는데, 무슨 역사성이 있을까 싶지만. (웃음) 내외부의 공간 체험이 없다는 게 아쉬워요. 한옥은 처마가 있고 내가 안방에 앉아 있으면 툇마루도 있고 마당을 볼 수 있고 내부와 외부가 유기적으로 교차하고 중간층의 공간이 있잖아요. 이 건축에는 그런 것이 하나도 없어요. 덩어리만 있는 거예요. 
DDP 5주년 기념 SPECIAL TOUR 한국 패션을 상징하는 아이코닉, DDP, 정구호 서울패션위크 총감독 서울에 불시착한 우주선 같은 DDP, 전문가 인터뷰를 통해 5년이라는 시간 동안 DDP가 우리에게 어떤 장소가 되었는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DDP와의 첫 만남을 기억하시는지요? 첫인상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기억이 나요. 마치 미래 도시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어요. 어딘지 모르게 매우 유기적인 느낌이 많이 나서 공간감을 잃은 것 같기도 했고, 방향 감각을 잃은 것 같기도 했어요. 그런 느낌이 나빴다기보다 오히려 나를 자하 하디드만의 공간으로 초대하는 것 같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 같은 느낌으로 기억해요. DDP가 처음 패션산업의 중심지인 동대문 일대에 들어선다고 했을 때, 패션계에서는 혹은 개인적으로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처음에는 저도 조금 의아한 부분이 있었어요. 건축이 자기만 돋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변 환경과 얼마나 잘 어우러지느냐가 중요한 거잖아요. 그런데 사실 DDP라는 공간 자체가 주변 환경을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만들어내잖아요. 그런 부분에서 살짝 의아했었죠. 나중에 돌이켜보니 그것도 건축가의 의도 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어요. 왜냐하면 DDP는 매우 오랫동안 정체돼있던 동네에 변화라는 제안을 한 건데, 만약에 이런 새로운 공간이 없었다면 동대문이라는 동네, 상권 자체에 큰 변화가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DDP가 동대문 일대에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내는 계기나 역할을 충분히 하는 것 같아요. DDP에서 우리나라의 주요 패션 행사가 열립니다. 한국 패션계에서 DDP의 위치, 위상은 어떤가요? 지난 5년간 패션계에서 DDP가 어떤 역할을 했다고 보시는지요? 특히 서울패션위크 기간에 외국인들이 굉장히 많이 방문하죠. 특히 외국 분들은 그 도시의 아이코닉한 건축물을 도시의 매력 포인트로 삼잖아요. 그런 부분에서 외국인들은 DDP가 가진 상징성과 그 가치를 좋게 평가하고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다가 DDP라는 매우 아이코닉한 건축물에서 패션 행사가 열린다는 사실 자체로서 국내 패션계에 집중할 수 있는 중요한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해요. DDP 같은 멋진 공간에서 행사할 수 있다는 거에  대해서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DDP 가운데 좋아하는 공간이 있으신가요? DDP는 내부도 좋지만, 저는 건물 밖의 전체적인 모습을 좋아해요. 건물을 바라보며 산보하듯이 걸어가다 보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건물 모양과 스카이라인이 계속해서 바뀌어요. 건축물은 고정되어 있지만, 실제 걸으면서 봤을 때는 건물이 움직이는 것 같은 굉장히 유기적인 느낌을 줘요.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어디에서 어느 방향을 보더라도 똑같이 보이는 부분이 전혀 없다는 점이 정말 좋은 것 같아요. 요새 플랫폼이라는 단어가 주요 화두입니다. 앞으로 DDP는 그 자체로서 어떤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패션산업과 연계해서 기대하시는 바가 있으시다면? 서울패션위크 행사가 DDP에서 지속해서 이어지다 보니, 많은 외국인도 서울의 패션을 DDP와 연결 지어 생각할 정도로 국내 패션계에서 아이코닉한 건물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자하 하디드의 건축이 그런 상징적인 이미지 자체를 패션에 심어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아요. 다양한 영역을 아우르는 맥락에서 살펴본다면 DDP는 어떤 가능성이 있을까요? 사실은 전 세계에 훌륭한 건축가들이 많이 있지만, 자하 하디드만큼 본인의 아이덴티티를 뚜렷하게 표출하는 건축가는 그렇게 많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랬을 때 자하 하디드가 이루어놓은 결과물이란 것이 사실은 매우 대단한 거죠. 어느 장소에서 말없이, 아무런 정보 없이 봐도 이것은 자하 하디드의 건물일 거라고 상상할 수 있는 하나의 거대한 아이덴티티 건축의 흐름을 만들었잖아요. 그런 점에서 DDP는 정말 훌륭한 거죠. 이런 멋진 공간이 만들어졌는데,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주변 환경을 더 잘 맞춰야 한다는 것이 더 중요한 점 같아요. 5주년을 맞은 DDP에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세요. DDP는 멈춰 있는 공간이 아니라 계속해서 발전하고 진화되어야 하는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미래적인 이미지를 가진 자하 하디드의 건축물과 함께 끊임없이 발전하고 진화하는 유기적인 공간이 됐으면 좋겠어요. 현재는 외부 대관 행사 및 전시들이 매우 많은 편인데, 저는 DDP 내에서 자발적으로 기획하는 다양한 전시들도 많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OHS 진행 최진이
DDP 5주년 기념 SPECIAL TOUR 다시 보는 하디드의 공간, DDP, 서울디자인재단+오픈하우스서울 DDP 개관 5주년을 맞아 서울디자인재단과 오픈하우스서울이 5월 스페셜 투어 프로그램을 준비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혹은 미처 알지 못한 DDP의 오늘을 탐색하기 위해 준비한 스페셜 프로그램이 2019년 5월 24일, 25일 이틀간 DDP를 가로지르며 열립니다.  비정형 곡면이 만들어내는 유려한 공간미, 자하 하디드의 유작, 강력한 어반 스케일이 구축한 장소. 도시에 불시착한 우주선처럼 낯설기만 했던 DDP는 서울의 일상에 어떤 풍경으로 자리 잡았을까? 개관 5주년을 맞아 서울디자인재단과 오픈하우스서울은 도시에 이식된 DDP의 풍경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했다. 우리가 알고 있거나 혹은 미처 발견하지 못한 DDP의 곳곳을 탐색해보는 스페셜 투어다. 시민들이 사랑한 DDP의 공간은 어떤 곳인지, 젊은 건축가가 해석한 자하 하디드 공간의 매력은 무엇인지, 동대문운동장과 한양성곽, 이간수문을 넘어 이 지역의 변화와 내력은 무엇인지, 우리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DDP의 공간을 들여다보는 시간은 그 장소에 새롭게 축적된 기억을 나누는 일이기도 하다. 조선 시대 이간수문부터 야구의 성지였던 동대문운동장의 기억,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자하 하디드의 DDP까지, 120년의 세월 동안 변화를 축적해 온 동대문 일대의 흔적을 찾아 DDP를 둘러싼 지역의 내력을 되짚어본다. 또 한국의 젊은 건축가의 시선으로 재발견한 자하 하디드의 공간을 돌아보며, 초기 안에서 지형을 따라 올라갈 수 있었던 DDP의 지붕, 그리고 거대한 DDP의 무주 공간을 가능하게 하는 스페이스 프레임, 육중한 설비 기계로 가득찬 기계실에서 풍도의 벙커까지, DDP의 백도어를 돌아보는 오픈하우스까지 4개의 스페셜 투어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시민들이 사랑한 DDP의 공간과 미처 발길이 닿을 수 없었던 이면까지 들여다 봄으로써 DDP를 입체적으로 살펴보는 새로운 동선을 찾아내 볼 예정이다. 지난 5년, DDP가 우리에게 어떻게 자리잡았는지, 주변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 어반 스케일의 공간이 주는 강렬함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다. 이와 함께, 정구호 서울패션위크 총감독, 윤현준 건축가, 하지훈 가구디자이너의 인터뷰를 통해, DDP가 갖는 의미와 앞으로 생각해볼 이야기를 나눈다.  글 _ OHS  포스터 디자인 _ 워크룸 
Interview 프로페셔널의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 도시건축가 김진애 ⑤ 대부분 20~30대 때 많은 에너지를 소진하기 때문에 40~50대에 어떻게 일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요. 에너지는 또 나와요. 체력이 있어야 일할 수 있는 건 확실해요. 어느 정도 타고 나는 게 있지만, 꾸준히 노력하기도 해야 해요. 제가 지금껏 끊임없이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체력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에요. 아무래도 젊었을 때보다는 체력이 떨어지니까 신경을 쓰긴 하죠. 그렇다고 특별히 체력 관리를 하지는 않아요. 저는 강아지들과 산책하는 것이 유일한 운동인 셈이에요. 낮에 가능한 한 많이 걷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려고 최대한 노력해요. 그 정도면 충분해요. 기본적으로 튼튼한 편이고 크게 아팠던 적도 없어요. 항상 농담으로 “울 엄마는 열을 낳았다. 나는 둘밖에 안 낳았다. 아이 열 키우는 에너지와 비교가 안 되니 얼마든지 더 일할 수 있다”라고 말해요. 저는 지금도 배가 고파요. 앞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 엄청나게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자기 체력이 조금 부족한 사람들도 있어요. 제 경우 열정적으로 장시간 일해도 괜찮은 편에 속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패턴을 파악하고 체력을 어떻게 안배해야 좋을지 계획해야 해요. 저도 나름의 작전이 있어요. 요즘 [KBS 열린토론] 프로그램을 매일 저녁 진행하는데, 워낙은 아침 시사 프로그램 제안이 들어왔어요. 한 마디로 얘기했지요. “아침 시간은 나를 위해서만 쓰는 시간이다. 아침 시간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은 김어준 공장장뿐이다.” (웃음) 저에겐 새벽 시간이 정말 중요해요. 새벽 네다섯 시에 일어나서 열 시까지 약 너덧 시간 동안은 꼭 내 일을 해요. 하루에 다섯 시간을 집중해서 자신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힘이 돼고 하루가 여유로워요. 그 이후 낮에 하는 일들, 예를 들어 사람 만나는 일 등은 물론 일이긴 하지만 노는 것과 비슷하죠. 그 때문에 기력이 소진되지는 않아요. 이제껏 유일하게 소진됐던 시간은 국회의원 시절 4대강 사업을 다룰 때였어요. 정말 쓸데없이 벌인 일에 제 체력을 소모한 거죠.
Interview 프로페셔널의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 도시건축가 김진애 ④ 정치권의 프러포즈를 계속 거절하셨지만, 2003년에는 열린우리당 창당 멤버로 참여하셨어요. 그건 제가 하고 싶어서 한 거예요. 자발적으로 하고 싶어서 하는 거 아니면 남에게 통제되고 싶지 않아요. 그때가 막 50대로 넘어갈 때예요. 농담처럼 ‘Turn-50’를 맞으면서 세 가지 시나리오를 세웠어요. 이것도 마찬가지로 ‘여성 전문가’의 상황과 관련되기도 해요. 여성 전문가로서 40대 중반이 넘고 나면 다들 뭘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와요. 첫째는 오퍼레이션 방식을 바꿔야 하나 하는 고민이었어요. 뭐냐 하면, 이른바 큰 프로젝트들을 빅 피쉬(Big fish)들이 장악하면서 여성 전문가들을 거북해하는 성향이 있어요. 자기들이 쓰고 싶을 때만 여성 전문가들을 쓰려는 성향이랄까요. 좀 만만하게 쓰고 싶은 심리겠죠? 현실이에요. 그런 현상을 넘어선다는 게 무척 어려워요. 빅 피쉬로 일하려면 사업 오퍼레이션이 좀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특히 도시건축계에서는. 그 길로 갈 것인가. 아니면 두 번째, 주문자에게 엮이는 게 싫으니 다품종 대량 생산을 하는 길로 가야 하나. 투자를 좀 해서 마련해 놓으면 밥벌이에 신경을 덜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거였죠. 세 번 째는 공공 영역 활동 쪽으로 더 나갈까? 공공 영역의 활동 제안은 나름 끊임없이 받아 왔으니까요. 이 세 가지 시나리오를 놓고 몇 년 동안 저울질하고 있을 때였어요.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등장한 거예요. 참여정부에는 이래저래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많기도 했거니와, 세상이 바뀔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있었어요. 지금 촛불혁명 후에 문재인 정부가 들어오면서 그렇듯이요. 정치를 안 하겠다고 한 이유 중 하나가 돈 쓰면서는 못하겠다는 거였어요. 다른 건 어느 정도 자신 있어요. 사람들과 노는 것도 잘하고, 정책도 잘 알고, 정치 프로세스도 잘 알고 다 좋은데, 돈으로 얽히는 건 못하겠다는 생각이었지요. 돈이 없어서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쓰면서 하는 방식이 너무 싫었어요. 그때 마침 공영선거에 관한 법이 생겼고 선거 자금이나 정치 자금에 대해서도 좀 더 투명해졌고, 제안도 들어왔기 때문에 이제는 해볼 수 있겠다 싶어서 제 발로 걸어 들어갔던 거죠.   무엇보다 2007년 건축기본법을 만든 것은 중요한 업적 중 하나가 아닐까 싶어요. 참여정부에서 대통령자문 건설기술ㆍ건축문화선진화위원회 위원장을 할 때, ‘건축기본법’과 ‘아우리(건축도시공간연구소, auri)’를 만들었어요. 이건 인정해줘야 해요. 건축계 역사상 이런 업적을 남긴 사람은 저밖에 없어요. 그때 사협회에서 상을 준다는 것도 필요 없다고 했는데, 이런 업적은 좀 널리 알려주세요. (웃음) 선진화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는 줄은 알았지만, 저에게 위원장 역할이 올 거라 생각을 못 했어요. 그때가 정치권에 들어가자마자 지역구 용산에 출마해서 떨어지고, 말하자면 야인으로 있을 때였죠. 사람들은 제가 그 위원회를 만들어서 위원장 자리에 앉았을 거라 여기기도 하는데, 저는 절대 그런 사람이 못돼요. 자리가 저를 찾아와서 맞으면 하는 거예요. 나중에 들어보니, 청와대에 있는 어떤 분이 나를 눈여겨봤다고 해요. 그 이유도 들어보니, 당시 국토부에서 별로 마땅찮은 사람들을 위원장으로 자꾸 추천했었는데, 보다 못해 어느 날 “김진애 어때요?”라고 했대요. 그랬더니 갑자기 좌중이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져서, ‘이 사람이 하면 되겠다’ 했다더라고요. (웃음) 제가 국토부에서 악명이 높은 편이죠. 성격도 강하고 발언도 세고, 이미 정치권에 들어가 있고 해서요. 위원장 지명됐을 때 국장이 찾아와서 설명하는데, 자주 안 나오셔도 된다고 해서 “아니 매일 나갈 거 아니면 뭣 하러 위원장을 해요? 다른 할일 없어요.” 했어요. (웃음) 그렇게 위원장을 2년 반 했어요. 준비 단계에서 이미 전문가들이 많은 안들을 짜놨어요. 다들 연구원과 기본법을 만드는 게 소원이더라고요. 과제 리스트를 죽 보는데, 이 두 가지는 국회를 통과해야 하는 거라서 자신이 없다, 열심히는 해보겠다고 했죠. 결국은 두 과제를 다 성사시켰어요. 첫해는 아우리(ARUI)를 만들었고, 두 번째 해에는 건축기본법 만들었으니까 제가 생각해도 참 놀라운 일이에요. 제 노력도 있었지만, 전폭적으로 지지해줬던 고 노무현 대통령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서거 10주기를 바라보며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니 마음이 그렇네요. 노무현 대통령은 저를 전문가로서도 믿어줬지만, 인간적으로도 상당히 믿어줬어요. 개인적으로 가깝거나 그러진 않았고 그저 몇 번 위원회를 통해 보고했을 뿐인데, 노무현 대통령 지원이 없었더라면 성사 못 시켰을 거예요.   건축도시공간연구소 만들 때는 국회 예산을 따야 하는 거라 총리실에서 난리였지요. 당시 예산 책정 때문에 언론에서도 비난받고, 국회의원들의 지지를 부탁하러 찾아가면 “연구소 만들면 당신이 소장되려고 그러는 거 아니냐?”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그 자리에 지원할까 봐 숙덕거리더라고요. “내가 만든 기관에 장으로 가겠소?”라고 할 수도 없고, 정말 질렸죠. 초대 연구소장으로 얼마 전 돌아가신 온영태 교수가 역할을 하였는데, 정말 다행이었어요. 저와 철학을 공유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에요. 국책연구소에 관한 법 개정이 힘들어서, 국토연구원의 부속 기관으로 출발했는데 나름 역할과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아요. 지금도 운영은 별도로 하고 있지만, 독립기관이 되면 좋겠는데, 언젠가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건축도시공간연구소에 ‘도시’가 들어간다는 거로 또 건축계에서 반대하고 난리였어요. 연구소를 만드는 과정에서 건축사협회장, 건축가협회장, 청년건축가협회장 등등 평소에는 만나지도 않는 협회장들과 여러 번 모여서 설득하고 엮는 일을 했어요. 맨날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죠. ‘도시’가 들어가는 걸 굉장히 반대했지만, 결국 ‘도시공간’으로 들어갔어요. 건축의 외연을 얼마나 키우는 건데, 왜 그걸 모르는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위원장직을 맡은 동안에는 열심히 설득했지요.   건축기본법은 건축 문화의 기틀을 만드는 일이었는데요. 그 역시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건축기본법 만드는 과정은 거의 기적이었어요. 그건 정말 노무현 대통령 없었으면 안 될 일이었어요. 비하인드 스토리를 얘기하자면, 국토부, 산자부, 문화부, 기재부 등등 관련 부처들이 다 반대했어요. 국토부는 이 위원회가 대통령 직속 위원회라서 국토부의 위상이 낮아진다고 하고, 문화부는 건축문화에 대한 자신들의 영역을 빼앗긴다고 생각했고, 산자부는 자신들의 디자인 산업 영역이 줄어든다고 반발하고, 기재부는 대통령 직속 위원회라는 부분을 지적하며 소극적이고, 하나같이 반대했어요.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하다 하다 안 되겠다 싶어서 ‘할 수 없다. 대통령 보고를 잡아라’ 했어요.대통령 보고를 잡으려면 적어도 한 달 반 전부터 스케줄을 확정해놓아야 해요. 날짜를 잡아 놓고 한참 작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아요? 평양 남북정상회담이 잡힌 거예요. 대통령이 평양에 가시니까 결과적으로 우리 보고회가 취소된 거예요. ‘아 이제 건축기본법은 끝났다. 어쩔 수 없다. 도저히 못 하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리고서 7월경에 일본 출장을 가 있는데, 갑자기 국장이 전화해서 남북정상회담이 일주일 뒤로 연기됐다고 하더라고요. 한 열흘밖에 안 남아 있을 때였어요. 그래서 정신없이 준비해서 보고하게 된 거예요. 
Interview 프로페셔널의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 도시건축가 김진애 ③ 여러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주택도시연구원을 나온 이유는 무엇인가요? 원천기술개발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고 우리 팀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만든 이후, 불행히도 제가 회의에 빠져들었어요. 그때가 거의 2년 좀 넘었을 때였는데 이것도 여성 문제에서 비롯됩니다. 내부에서 받는 견제는 항상 있었지만, 나보다 남자들을 먼저 승진시키더라고요. 별것 아니었지만, 예를 들면 월급을 더 많이 준다거나 했어요. 또 제가 후배라 해서 선배가 슬그머니 얹혀가려는 상황도 기분이 얹짢았고요. 여기에 계속 있으면 안 되겠구나 싶었어요. 이 물이 저에게 너무 작아서 마음대로 뛰놀지 못하겠더라고요. (웃음) 당시 외부 원고 청탁도 많이 들어올 때였는데 원고도 마음대로 쓰지 못했고, 여러모로 자유롭지가 않았어요. 또 제도 개혁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어딜 가든 가만히 있지 않았어요. 모든 회의에 들어가서 여러 경로를 통해서 바꿔나가고 그랬죠. 그것도 한 2년 하니 지치더라고요. 이건 아니다 싶어서 관둬야 하겠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러고 보니 갈 데가 없는 거예요. 갈 데가 없는 건 괜찮아요. 오라는 데가 없는 건 찾으면 돼요. 더 큰 문제는, 도대체 내가 가고 싶은 곳도 없었어요. (웃음) 요새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벤처를 만들듯 하고 싶은 걸 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때는 희귀한 케이스였어요. 더군다나 박사 학위를 받았으니 사람들은 제가 어떤 조직에서 일하기를 기대하잖아요. 그래서 몇 달 동안 고민했어요. 어느 날 새벽에 혼자 앉아 있는데 불현듯 ‘아니, 가고 싶은데도 없고, 오라는 데도 없으면, 그냥 하고 싶은 거 혼자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생각이 드는 거예요. ‘어우, 나 천재다!’ 했어요. (웃음) 그래서 그때 회사를 만들기로 결정했어요. 물론 혼자서 했던 것은 아니에요. 주변에 벤처 형식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과 함께 회사를 만들었어요. 물론 제가 주도적으로 일하는 거지만. 그렇게 해서 ‘서울포럼’이 만들어졌어요.   서울포럼으로 독립한 게 가장 힘든 선택이었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선택이었어요. 그때 스스로 바보라고 생각한 게 뭐냐면, 30대 중반까지 한 번도 이런 독립을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때까지만 해도 박사 학위도 받았으니 어느 조직에 가서 팀장이나 기관장 정도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저 자신의 폭, 제 세계의 폭을 한정시켜놨던 거죠. 사람이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는 말이 그런 거죠. 그때 완전히 알을 깨고 나온 거예요. 그때 독립한 것이 인생에서 저 자신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되었고, 또 우리 사회에도 도움이 됐다고 믿습니다. (웃음)   서울포럼에서 도시건축과 관련된 일뿐만 아니라 기획, 출판, 저술까지 다 아우르셨다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특히 기획 업무가 하고 싶었어요. 솔직히 말해 설계에 주력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어요. 설계 잘하는 사람은 워낙 많아요. 저는 스스로 특정 프로젝트를 가장 적합한 방향으로,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나가는 것에 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어요. 저 자신을 잘 파악했던 거죠. 그런데 당시 국내에서는 아직 그런 요구가 별로 없었어요. 활동했던 시기가 1990년대인데, 마침 앞서 얘기했던 민영화와 세계 자본주의에 관련된 일들이 말하자면 물밀 듯이 생길 때였어요. 그러면서 기획에 대한 요구(needs)가 필요해진 거죠. 솔직히 그전까지는 땅 짚고 헤엄치기였지만, 이제는 ‘무엇을 지을까? 어떤 구성으로 해서 짓는 게 좋지? 이건 누구하고 함께 하면 좋지? 기술은 어떻게 하면 좋지?’ 등등을 기획하는 수요가 있었어요. 그걸 파악했기 때문에 시작했던 거였어요. 건축 설계는 가끔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프로젝트가 있으면 했지요. 인사동 프로젝트는 제가 재미있어서 한 거였어요. 앞서도 얘기했지만 제가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잖아요. 출판도 마찬가지예요. 어떻게 보면 대기만성형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저는 30대 중반부터 신문에 칼럼을 쓰곤 했어요. 어렸을 때 꿈 중 하나가 작가이기도 했고, 글에 대한 존경심이 있어서 책도 많이 읽었어요. 언젠가는 책을 쓰겠다고도 했지만,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어요. 나중에 돌아보니 이유가 있더라고요. 글에 대해서 확실하게 눈을 떴을 때가 미국에 있을 때였는데, 영어로 글을 써야 하니 항상 자신이 없었던 거예요. 미국에 있는 애들이 나보고 글을 참 잘 쓴다는 이야기는 했어요. 문법만 조금 고치면 될 뿐, 톤이나 글의 시작이 굉장히 좋고, 주제 개념도 참 좋다고요. 영어라 소극적이었던 거였는데, 한글로 쓰게 되니 막 폭발을 하는 거죠. 또 프레젠테이션을 매우 잘한다는 것도 주택공사에 가서 알았어요. 미국에서 영어로 할 때는 항상 조심스러웠던 거죠. 미국에서 얼굴이 시뻘게져서 이야기하던 것이 나중에 다 힘이 됐어요.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프리젠테이션인지 알게 된 거예요. 미국에서는 확실히 그런 게 훈련이 돼요. 무엇을 하든 상대편, 즉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가 중요해요. 또 콘셉트 없이 이야기하면 바로 외면당해요. 이 분야에서 강홍빈 선배가 독보적으로 뛰어난 사람인데, 제가 그분에게 인정을 받았어요. (웃음) 농담 삼아 “강홍빈을 이겨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저를 주목하는 거예요”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항상 후배라고 생각했던 친구가 이제 동료로구나’라는 메시지를 선배의 눈에서 읽었을 때, 기분이 정말 좋았어요. 여성이나 남성이나 우리는 일하면서 프로로 인정받을 때, 동료로 인정받을 때, 그리고 내가 정말 잘한다는 것을 상대편이, 그것도 일 잘하는 상대편이 존경해줄 때 기분이 매우 좋아지잖아요. 그래서 자신감도 생겼고, 스스로도 ‘나가도 먹고살기는 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사람들은 저를 까칠하다고 보는 편이지만 저는 꽤 사교에 능한 편이에요. 혼자 있는 것을 무척 좋아하지만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좋아해요. 이중적이죠. 사람들을 만나면 즐겁게 해주려는 성향이 있어요. 사람들 만나면 나도 모르게 흥이 나고, 얼굴이 환해져요. 일단 접하기 힘든 재미난 이야기를 많이 하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예요. 툭툭 던지는 제 이야기가 자극도 되고 하니까. 그러다 보니 클라이언트 관리도 되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서울포럼 하면서 제 여러 가지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출판도 전혀 생각이 없다가 하게 됐어요. 이야기하다 보니 결론은 어쩌다 하게 된 게 참 많다는 거네요. <서울성>이란 책을 처음 냈었는데, 그 책은 서울포럼을 시작하면서 저를 알리고 싶어서 계획했던 책이에요. 유명 출판사에서 관심을 보였고 계약까지 갔는데 저자로서는 달갑지 않은 조건을 걸더라고요. 그럴 바엔 차라리 직접 내자 하면서 출판하게 된 거예요. 밀라노 트리엔날레 하면서 온갖 종류의 인쇄 과정은 다 꿰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지요.